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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의 뙤약볕. 오영철 작곡가를 만나다.

다감이 박아현

다감이 박아현

동요라고 하면 아이들의 맑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목소리는 어쩐지 한 여름의 우거진 초목과 눈부신 바다를 닮았다. 한 여름의 우거진 초목과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 때문이다. 강렬한 햇살에 초목은 더욱 짙푸르게 우거지고 바다는 더욱 깊게 빛이 난다. 그래서 오늘은 초목과 바다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여름 햇살 같은 사람. 오영철 동요 작곡가를 만났다.

오영철작곡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현재 동구에 있는 상진초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고요. 울산, 부산 동요사랑 회원 및 한국 음악동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해마다 새로운 동요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울산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 동구풍물연합 사무국장, 울샘밴드 음악감독으로 다양한 음악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수상으로는 울산 동요대상 및 국악대상, 부산동요사랑회 동요대상, 제12회 대한민국 찬불가요제 동요부문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동요작곡가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음악활동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음악 전공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초등학교 교사이다 보니 동요 쪽으로 관심이 더 기울었습니다. 필연 같아요. 항상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런 아이들에게 느끼는 저만의 감각과 느낌이 있었습니다. 초임교사 시절부터 그런 느낌들을 멜로디나 화음진행으로 정리해 뒀어요. 그걸 자연스럽게 곡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되었고, 그걸 바탕으로 동요를 사랑하고 좋아하시는 분들과의 모임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2000년도였어요. 그때부터 그분들과 함께 시작 한 것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네요(웃음).

초등학교 선생님과 각종 활동을 하시면서 작곡 활동을 하시는 게 힘들지는 않으세요?

초등학교 교사는 학교 일과 이후에 혼자 쓸 수 있는 시간이 조금 생깁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짬짬이 작업을 해요. 작곡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학교일과를 모두 마친 텅 빈 교실에 혼자 있는 시간입니다. 그때 작업이 가장 잘 되는 것 같아요.

오영철작곡가

동요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국악관현악단 부지휘자라고 하셨잖아요. 사실 국악이라는 장르 자체가 우리의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국악은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원래부터 타악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 다닐 때에도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러다 2000년도에 자연스럽게 국악으로 전향했어요. 국악에는 타악기도 많고 타악기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장단들이 많잖아요. 거기에 매료 됐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국악에 빠져 북을 쳤어요. 그리고 그 경험이 제 곡에도 고스란히 녹아들게 되었습니다. 리듬을 좀 더 다양하게 쓰게 된 거죠. 서양의 박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의 자진모리장단이나 굿거리장단 등을 활용한 작업이 가능하게 됐어요.

작곡가 활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야기 해주세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꽤 많습니다만 특히 2014년 부산동요사랑회 공연 때 선용 선생님의 글에 곡을 붙인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어버이날에’라는 곡인데, 이 곡을 부른 아이가 목사님의 아이였어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곡이 굉장히 마음에 드셨었나 봐요. 가수 해바라기 공연의 초청공연으로 아이가 출연하여 제 곡을 불렀을 뿐 아니라, 그 모습을 아버님 본인의 블로그에도 올리셨다고 해요. 사실 제 곡을 누군가 좋아하며 불러준다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입으로 흥얼거리기만 해도 굉장히 기분이 좋은데 초청공연에, 블로그까지.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한인 라디오 방송국에서 2015년 5월 8일 전후로 제 곡이 방송에 많이 나왔대요. 아무래도 제목이 ‘어버이날에’다 보니 그 시즌에 많이 방송에 나간 것 같아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굉장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머나먼 이국땅 인도네시아에서 제 곡이 라디오로 울려 퍼졌다고 하잖아요.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요. 그런데 작년에도 5월 8일에 제 곡이 지방 방송국 라디오에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작곡가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소식을 들은 후 선생님의 작업에 무언가 바뀌신 게 있나요?

이 소식을 들어서 제 곡의 느낌이 바뀌었다라고 하기 보다는 제가 꾸준히 작곡해 오면서 보고 느낀 것들로 인해 제 곡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처음 제가 작곡을 시작했을 때는 음이 무척 아름답고 복잡한 곡을 선호했습니다. 예술성만을 따진 작업이었어요. 하지만 제 곡을 아이들이 부르고, 또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동요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고 쉽게 부를 수 있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음과 화음을 쉽고 유아틱하게 바꾸었죠. 실제로 ‘다람쥐 삼형제’라는 곡은 가사가 무척 귀여워요. 이런 가사에 화려하고 예술성이 강한 음이 붙는다면 다소 어색할 겁니다. 이걸 가사와 멜로디의 합치성이라고 하는데, 이 합치성은 모든 노래에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돋보이게 해주는 거지요. 이 합치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난 뒤부터 제 곡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선생님의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이 있나요? 있다면 어떤 곡이고 왜 기억에 남으시나요? 그리고 가장 아끼고 애정을 가지고 계신 곡은 어떤 곡인가요?

기억에 남는 곡들은 처음 쓴 곡인 ‘해질 무렵’, 저희 반 반가로 계속 쓰고 있는 ‘자세를 바르게’, 제 아들들이 좋아하는 ‘다람쥐 삼형제’ 그리고 제1회 서덕출 창작동요제 입상곡인 ‘우리 애기 은방울’과 위의 에피소드에서 말한 ‘어버이날에’ 등입니다. 이중 특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곡은 ‘우리 애기 은방울’ 과 ‘다람쥐 삼형제’입니다. ‘우리 애기 은방울’은 합창곡으로도 편곡되어 지금도 합창단 공연에 많이 불리고 있고, ‘다람쥐 삼형제’는 우리 반 아이들과 제 아이들도 많이 좋아해요. 아무래도 작곡자 입장에서는 지금도 많이 불리는 곡에 애정이 쏠리게 되더라고요.

무대 위

울산에서 예술가로 활동할 때의 애로사항이 있나요? 그리고 동요 작곡가를 꿈꾸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울산은 지역이 작아 모이기가 쉬워 음악 단체 활동하기가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주중에도 모여서 연습하기도 좋고 예술가들끼리 모여 소통의 자리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경남에서 근무하다가 와서 느끼지만 경남은 지역이 넓어 한번 모이기도 어렵고 모여도 다시 돌아가기 많이 힘들었습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모든 예술가들이 느끼는 지원에 관한 부분이겠네요. 예술가들이 활동하는데 드는 노력이나 금전적으로 어려운 부분에 조금 더 지원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요 작곡가를 꿈꾸시는 분들에게는 일단은 도전해 보라고 얘기 하고 하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면 다들 하시는 이야기가 “음악도 잘 모르고 악기도 잘 못 다루는 사람도 할 수 있나요?” 라고 많이 이야기 하시더군요.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일단 가사를 받고 반복적으로 계속 읽어 보세요. 읽다 보면 자기만의 음율이 생깁니다. 음율을 피아노나 리코더를 가지고 멜로디만 만드세요. 그것이 바로 작곡입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다음에 화음을 알고 반주도 만들어 보면 점차 자기만의 곡이 나오고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동요 작곡도 처음부터 많은 학문적 지식이나 기능을 알고 하는 것 보다는 일단 도전하여 보고 시행착오나 수정을 통해 나만의 느낌이나 방법을 가지는 것이 더욱 소중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일단 부족한 저를 이렇게 초대해 주신 울산문화재단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저를 동요작곡가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여러 선배 작곡가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 드리고 앞으로도 동요작곡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울산 문화발전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여름의 햇살 같던 인터뷰가 끝이 났다. 오랜만에 동요를 접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동요를 접하는 것은 아주 어릴 때, 혹은 부모가 되어 아이를 양육할 때 외에는 잘 없는 것 같다. 나 역시도 동요를 거의 잊고 지냈다. 하지만 분명 지금도 어린 시절 흥얼거리던 동요들을 기억한다. 모두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동요를 기억하고, 동요를 흥얼거리면 괜히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다.
인터뷰를 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나는 동요 작곡가분과 작사가분들에게 값을 매기지 못할 선물을 받은 것 같다. 동요를 배우고 부르던 시절의 추억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마치 한 여름 뙤약볕 아래 우거진 초목과 바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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