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머물고 살맛나는 소금포 마을-
다감이 정정윤
염포동이 예전에 소금 창고였다는 것에 대해 아시나요? 다감이도 이번 기획 기사를 쓰면서 염포동의 소금길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는데요, 생각지도 못했을 정도로 염포동에는 굉장히 유구한 역사가 서려있었습니다.
울산에서 염포동의 '염포'는 鹽(소금 염)으로 이는 ‘소금’과 ‘바닷가’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염포의 기원은 삼국시대 진한 24개국 중에서 ‘염해국’으로 보는 설, 이어서 이것이 울산의 옛 이름인 염개(鹽浦)와 연관이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삼국시대 염해국은 진한연맹체의 일원으로 있으면서 3세기 후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신라에 점령되었으며 당시 경관이 아름다운 울산 동구 어풍대가 신라왕들의 휴양지였다는 설과 함께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관문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울산은 지금도 소금이 생산되는 서해안처럼 소금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지리지』)에 울산의 구운 소금 생산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울산군의 남쪽 세 곳에 염소가 있다. 염창, 즉 소금 창고는 읍성 안에 있으며, 염장관을 따로 두어 관리하도록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300여 년 전에 울산목장의 감목관으로 왔던 유하 홍세태는 이곳 울산에서 쓴 한시만 해도 200여 수나 됩니다. 그 중에 염포에 관한 시가 여러 수 전해지고 있습니다.
포구밖에 나가보니 산은 온통 눈 덮여 서남쪽은 새하얗게 쌓였구나
소금 굽는 마을엔 아침 연기 새어나고
봄 바다 잔물결에 고깃배 출렁인다
마음은 갈매기와 길동무라도 되었으면 지은 시 하늘처럼 원숙하길 바란다네
청송사에 묵기로 기약했던 오늘밤은 스님과 함께 자면 정말 좋겠네
그런데 『경상도지리지』 이후 소금 생산에 대한 기록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몇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혹자는 지층조사로 확인된 것처럼 이곳이 갯벌로 바뀌어 염전이 어렵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염포'라는 지명을 붙인 것으로 보아 생산은 하지 않았으나 관리지로서 저장이나 교역이 일어났던 곳일 가능성이 있다고도 합니다.
1426년(세종 8년)에 염포는 부산포, 웅천 제포(현재의 창원 진해에 있던 항)와 함께 '삼포 개항' 이후 국제항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참고로 동축산 정산에 염포 개항 기념공원이 만들어졌는데, 이곳에 옛 염포 지역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하네요.
염포항과 인접한 내황(內隍)은 무역항으로 외지 상선이 집중적으로 정박하여 규모 있는 교역이 이루어진 만큼 정박 시설과 저장시절 등의 배후 시설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내황과 반대가 되는 외황(外隍)은 개운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염포는 개항된 세 항구 중에서 해양운송에 가장 악조건의 포구였습니다. 염포는 배후지가 적고 서울까지 화물을 운송하는 경로에서 비켜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염포는 대양과 면하여 어업에 불리하고 주변에 섬이나 공한지가 없어 토지를 개간하기 어려웠던 까닭에, 결과적으로 가난하고 퇴락한 곳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기록을 찾다보니 ‘제포의 왜인은 가호가 번성하고 부유하여 의복도 아름다우나, 염포와 부산포의 왜인은 가난하기가 막심하다.’라고 표현되어있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울산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염포 역시 많은 변화을 겪게 되었습니다.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정책에 따라 염포 일대는 산업단지로 조성되었고, 타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이주해왔습니다. 생업과 구성원이 바뀌는 사이, 염포의 자연과 역사성이 단절되고 소실되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는 울산 해안에 풍문처럼 도는 이야기처럼 "이 동네는 강아지도 돈을 물고 다닌다"라는 골드러시의 산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그 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정책적으로 도시재생이 필요한 곳으로서 다양한 사업들이 전개되는 지역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염포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있을지 궁금해졌는데요.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염포에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최근 몇 년 사이 염포에서 교육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권성옥 작가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이어서 동사무소를 찾아 최근 염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는데요. 약 6년 전인 2013년도부터 꾸준히 '우리마을 역사 알기'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고, 2016년에는 염포·양정지구 도시재생 5개년 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바로 작년에는 <삼포만 이야기 꾸러미>가 발간되기도 했다는 소식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시재생사업은 인구의 감소, 주거 환경의 노후화 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 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 및 지역자원을 활용하여 활성화시키기 위한 정책 사업으로, 염포동과 양정동은 1960년대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산업단지를 조성했으나 이후 산업체 배후주거지의 노후화, 주변지역의 개발로 인해 지역 인구가 급격한 감소한 것과 더불어 아산로 개통, 산업의 근무형태 변경 등으로 지역 통행량과 방문객이 급격하게 감소했다고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염포동 일원에서 진행되는 도시재생 사업은 소금포 역사관 조성 및 신전시장 환경개선, 양정 중앙로 자동차 테마거리 조성, 소금포 창조성 향상 사업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밖에도 <염포∙양정 도시재생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도시재생 대학>은 도시재생사업의 참여 주체로서 주민역량강화를 위하여 지역 자산 스토리텔링 및 지역 활력 아이템 구체화를 위한 교육과정으로 도시재생대학을 열고 있다고 합니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염포∙양정 도시재생 현장지원센터-소리샘 소식지>에 안내하고 있다고 하네요.
염포동 주민센터를 나서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참고로 주민센터의 현재위치는 2013년도에 염포운동장 앞쪽으로 옮겨온 곳입니다. 이전 주민센터 건물은 2014년부터 '북구 염포예술창작소'라는 이름을 얻어 전국, 전세계 작가들을 초청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레지던스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염포동 노인회관을 찾았는데요. 바둑과 화투를 두시는 할아버지 사이에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하신 3분께 지금까지 체감해온 염포의 변화에 대해 여쭤보았습니다.(할아버지께서 익명을 요청하셔서 A·B·C 가명으로 옮겨적었습니다.)
지금까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염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어르신의 "소금이 다시 만들어진다면"이라는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네요. 과거 삼포 개항구로서 울산을 대표하던 염포가 현재 주민들과 소통하는 염포로, 미래에는 소금포 역사관과 국가 주도의 대규모 공단조성(현대자동차)사업으로 지역의 환경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조성되어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고 그 역사성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울산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기대되며, 잘 이뤄지길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