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인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전에

베트남 왕언니 양월계씨를 기억해주세요

다감이 김금주

다감이 김금주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권도 넘을 거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그중에는 개인의 인생사가 고달픈 삶을 살아 온 서러운 이야기를 넘어 역사적 자료로 중요한 이야기라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다감이는 이번에 조금 특별한 분을 만나보았다. 바로 지난 수십 년간 울산에서 삶을 꾸리며 재울 베트남인들의 상담처가 되어주고 있는 양월계(楊月桂)씨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베트남과 한국역사의 부침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왔던 세월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5월에 '세계인의 날'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그녀의 이야기를 나누고 기억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웃는 법을 잃어버린 베트남왕언니 양월계씨 모진 세파에 웃음을 잃어버린 베트남 왕언니 양월계씨

다감이와 양월계씨의 인연은 7년 전 국제교류센터에서 주관하는 ‘이주민 여성 한글학교’에 한국어 교사로 봉사를 나가면서 시작되었다. 손녀뻘인 20대 초반의 외국인여성들 사이에 한글을 배우기 위해 앉아 있는 그녀의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둘 듣게 된 이야기는 꾸밈없는 독백과도 같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날은 눈물을 쏙 빼고, 어떤 날은 코미디처럼 웃고, 어떤 날은 칼날 같은 양국의 역사에 분노하기도 했다.

그녀의 역사......

1943년, 베트남에서 중국이민자 가정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부친이 사이공에서 큰 식당을 운영해서 풍족하게 살았다. 여고를 졸업하고 식당일을 돕고 있을 때 중장비 기술자로 월남에 왔던 한국인 P씨를 만났고 6개월간 교제를 하고 1967년에 결혼했다. 당시 P씨가 월급 전액을 한국에 송금하였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 때문이라 생각하고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친정 식당일을 하며 베트남에서 결혼생활 8년 동안 2남 2녀를 두었다.

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 1975년 조성된 '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 전경(現 해운대구문화복합센터 맞은편)
사진출처 : 디지털부산역사문화대전(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 항목)
※ 해당 사진의 저작권은 부산광역시청에 있습니다.

1975년 월남이 망하면서 공산화된 베트남이 외국인과 결혼한 자국민을 추방하게 되자 그녀는 친정식구들과 헤어져 남편과 함께 한국 해군함정을 타고 부산에 있는 난민보호소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하지만 수용소 생활 2개월 만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P씨의 부인이라면서 한 여자가 찾아 왔던 것이다. 이 부인을 따라 자녀들과 함께 도착한 곳이 울주군 범서읍 삼호마을이었다. 집에는 남편의 또 다른 자녀가 둘이나 있었다. 이때부터 한 지붕 두 가족의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시집의 구박은 심했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살 수가 없었다.

그렇게 2개월 정도 함께 살다가 양월계씨는 자녀들을 데리고 인근 단칸방으로 나왔다. 이때부터 생계를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남처럼 살던 남편은 7년 후 중병이 들자 그녀의 집으로 왔다.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남편 간병까지 했고 남편이 죽자 이제 본부인의 자녀 두 명까지 그녀에게 왔다. 이 당시 그녀에겐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원망이라든가 미움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었다.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자녀 모두 대학공부를 시켰고 지금은 모두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양월계씨는 안타깝게도 정식으로 한글을 배울 곳이 없었던 탓에 1990년이 되어서야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2000년대 들면서 결혼이주민 여성들이 늘어나자 누구보다 그 마음을 알고 이주민 여성들을 돕기 시작했다. 시댁과의 소통에 힘들어 할 때면 한국인 시어머니와 친구가 되어 베트남 문화를 알려주고 베트남 신부에게는 한국예절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왕언니’이다.

꽃나비가 되어 날아가고파 "꽃나비가 되어 날아가고파“
최근 한국무용을 비롯해 다양한 춤을 배우고 있다는 양월계씨
김금주(다감이) :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요즘도 노인복지회관에서 댄스 배우세요?
양월계(양) : 예. 일주일에 두 번씩 스포츠 댄스도 하고 한국무용도 배워요. 아, 근로자 복지회 관에서 벨리댄스도 배워요. 선생님 한국무용 옷 예쁜데 보실래요?
김 : 원래 춤 좋아하셨잖아요. 어려울 때 무용 옷 바느질해서 파는 일도 하셨고요. 이야기 나온 김에 그 동안 하셨던 일 쫙 늘어놔 볼까요?
양 : 성남동에서 풀빵 장사할 때 하루 종일 팔고 집에 오면 돈은 없고 돌멩이와 종이만 들어있더란 얘기는 했죠? 밀가루도 팔고, 봉투도 팔고, 고물상도 하고 도넛장사도 했고 몰래 미용사도 했어요. 난민보호소 물건 떼다 야매장사도 하고. 아이고, 말도 말아요. 그러다가 현대자동차에서 부품 끼우는 일하면서 좀 나아졌지요. 현대중공업에서 도장일도 하고, 금강개발에서는 사무실에 앉아서 일도 했어요. 맞다, 염포동에 살 때 똥 퍼는 일도 했어 요. 아이고, 그때는 울산도 시골 같았어요.
김 : 그럼 언제부터 살만하다 느끼셨어요? 지금은 좋아보이세요.
양 : 몸 고생이야 자식들 공부시키고 나니까 끝났다 싶었는데 이 마음이 문제지. 1992년에 한국하고 베트남하고 수교되면서 베트남 사람들이 울산에 많아지니까 통역일이 생겼어요. 문제 생기면 공장으로, 경찰서로 다니면서 나도 잘 못하면서 통역했어요. 그때 버스에서 창문을 보는데 눈물이 났어요. 진짜로 사는 것 같아서요.
김 : 베트남어로 말하는 것도 얼마나 그리웠겠어요. 좀 어려운 질문 하나 할게요. 문화가 무엇 인거 같으세요? 한국문화, 베트남문화 이런 거요.
양 : 아직도 한국말 잘 못하는데 제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냥 말이 통하면 되요. 다 말이 안 통하니까 소통이 안 되서 문제가 생기던데. 말만 통하면 예절이나 문화 이런 거 다 이해 되요. 똑같아요.
예쁜 한국무용 옷을 좋아하는 양월계씨 한국무용 의상 자체도 예쁘고 자신에게 잘 어울려서 좋다는 양월계씨

양월계씨는 베트남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중국어는 능통하고 영어도 간단한 대화가 가능하다. 앞서 옮긴 것과 같이 2000년대 들어 한국으로 이주해오는 사람이 많아지기 전까지는 제대로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일은 고통이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욕이나 무시는 상처였다. 그녀에게 문화가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원망할 곳 없는 세월이 준 답일 것이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지만 이제는 불편하지 않다고 한다. 한글을 가르쳐 주는 곳도 많고 서툴러도 사람들이 알아들으려 노력한다고 한다. 그녀는 “많이 변했다.”고 했다.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역사......

베트남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많은 전쟁과 식민지 시절을 겪은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강세력에 의해 남북으로 나뉜 베트남이 통일을 원하자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고 이것이 ‘베트남전쟁(1960년~1975년)’이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한국은 1964년부터 베트남에 파병을 하고 1966년부터는 건설업체가 진출하여 많은 기술노동자들이 외화벌이를 하게 된다.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베트남 전체가 공산화가 되고 이때부터 공산화를 피해 탈출한 ‘보트피플’은 국제적인 이슈가 된다. 한국은 1975년 4월 파견군인과 노동자들과 함께 베트남 난민을 해군함정에 태우고 탈출하였다.

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 1977년에 문을 연 '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
사진출처 : 디지털부산역사문화대전(부산 베트남 난민보호소 항목)
※ 해당 사진의 저작권은 부산광역시청에 있습니다.

한국으로 온 베트남국민들은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現 해운대구문화복합센터 맞은편)에 있는 ‘베트남 난민 보호소’에서 1977년부터 거주하기 시작했고, 미국, 유럽, 일본 등으로 차츰 망명하고 남은 마지막 110명이 뉴질랜드로 이주하기 전까지 16년 동안 운영되었다.

그 사이 베트남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를 선택해 공산시스템이 붕괴되었고, 한국과 1992년 정식으로 외교를 수립하였다. 베트남 국민들이 머물렀던 보호소는 1993년 2월 폐쇄되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던 끝에 2010년대 초반에 해체, 많은 이야기를 묻어놓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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